어색함 없이 만화방에서 책 빌려보던 집안 어르신 덕에 만화라는 매체에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신간 정보를 섭렵한다거나 만화로 둘러싸인 일상, 그런 꿈같은 환경에서 자란 건 아녔고요.
식구 단위로 빌려서 본 가장 먼 기억 속 만화 타이틀은 이상무 선생님의 '울지 않는 소년'이랑 '캔디 캔디'가 있습니다.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 소년경향, 보물섬, ...
뜨문뜨문 집에 입고(?)되던 비 연속성 소년 잡지 구독은 연재의 의미를 잃는가 싶었으나 집에서 대충 깎던 머리카락을 취학과 함께 빨랫비누로 머리를 감아주던 동네 이발소나, 놀랍게도 학급 문고를 이용하면서 빠진 연결고리를 엮게 됩니다.
저를 포함해서 만화책을 꾸준히 사보는 동네 친구는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윤승운 선생님 그림을 따라 그려서 어깨동무 독자 그림엽서에 응모했던 국딩 2학년 때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소년잡지 중간에 손바닥만 한 작은 판형으로 단편 만화가 실리곤 했습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건 깔끔한 순정만화풍 그림체의 아마도 '신영'이라는 작가분의 제목 모를 단편이 있는데요.
한참 나중에 대충 20년이 지나서 본 '환상특급 The Twilight Zone (1959)' 에피소드 12, 'What You Need'랑 내용이 똑 같아서 묘하게 반갑더군요.
애니메이션 '캔디 캔디' 인기가 정점을 찍고, 음료수 쌕쌕 한 박스를 사면 드라마 카세트를 준다는 TV 광고도 있었습니다.
(봉봉이었나? 닐과 이라이자가 캔디를 쌍으로 놀리는 구간만 반복해서 듣곤 했습니다)
주황색 표지에 사각 그리드를 촘촘하게 하트로 가득 채운 캔디캔디 단행본 한 권이 집에 있었습니다.
(잘 찢어지고 해지기 쉬운 컬러 종이 커버는 지금도 지켜주기 참 어렵습니다)
테리우스가 계단에서 캔디를 백 허그했던, 아마도 6권 아니면 7권이었는데, 초1 때 같은 반 Y.진희라는 친구를 빌려주고 못 받은 기억은 왜 아직도 남아있는지...
Y.진희라는 친구는 전학을 갔고, 3학년이 된 어느 날, 학교에서 단체로 극장 관람을 합니다.
두, 세열 앞에 앉은 무리 중 거짓말처럼 익숙한 뒤통수에,
'어, 야! 너 Y.진희지!!?'
'어어어... 맞는데 너는 누구?'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고 싶은 건지 싶어 이 친구 아버지께서 모 공기업에 다니신다는 걸 기억해 내면서,
'너희 아빠 XXX 다니시잖아, OOO 초등(국민)학교 1학년 3반이었고, 캔디 캔디 빌려 가고 안 줬는데...'
뭐 아무튼, 살면서 빌려준 책 못 받은 다섯 번의 기억 중 첫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ㅎㅎㅎ
(다섯 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섯 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ㅋㅋㅋ)
그러고 보니 부모님 방에 하늘색 바디의 빨간 뚜껑 휴지통은 캔디 캔디 장면이 인쇄된 필름 바리였네요.
그림엔 저의 최애 캐릭터, 스테아가 모는 자동차에 아치와 캔디가 타고 있었죠.
'아랫집, 장생이(형)네 이사 나가고 새로 일본에서 살던 분이 이사 들어왔대요...'
YJ형이랑 YH누나 남매 식구가 아랫집으로 이사 오고 집안 어르신들끼리 교류가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몇 번 놀러 갑니다.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는 것도, 동네 친구 집 놀러 나가는 거에도 제약이 많았던,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집안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아랫집 형네 집에 놀러 간, 몇 번 안 되는 기억은 그 희소성만큼 놀라운 추억이 있습니다.
동양철학 공부를 위해 유학을 하신 아버지와 남편 뒷바라지로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셨다는 어머니, 그리고 두 남매분이 사는 4인 가족입니다.
집안에서는 일본어를 쓰셨다는데, 직접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하나로통신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보다 20년 앞선 비교광고, 티티파스의 제물이 된 사쿠라 파스가 진짜 일본에 있냐고 물어본 게 이 형이랑 나눈 몇 번 안 되는 대화일 만큼 어릴 적 기억입니다)
딱 한 번, 담을 사이에 두고 형의 공부방 창문을 향해 얘기를 나누는 도중 YJ형 아버님께서 부르자 반사적으로,
'はい!'
대답과 함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튀어! 달려 나가는 형의 모습은 담장을 사이로 국경 너머처럼 느낀 신기한 경험이었죠.
그리고 어느 날, (증조)할머니를 따라 놀러 갑니다.
마침 라면 박스보다 고급진 종이 박스 안에 책 정리를 하는 형 옆에서 신세계를 봅니다.
구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관된 '캔디 캔디'랑 '동짜몽', 아니, '도라에몽' 만화책 원본이었죠.
(물론 박스는 하나만이 아녔습니다)
총 9권으로 기억하는 '캔디캔디' 마지막 권에 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고 있는 캔디와 알버트 아저씨 칼라 브로마이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당시 고등학생이던 YJ형 공부방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책꽂이에 눈이 돌아가는 물건이 보입니다.
'형, 나 이거 주면 안 돼?'
'응, 이건 안돼.'
(그렇다고 다른 걸 받은 건 또 아녔습니다. ㅋㅋㅎ)
책꽂이에서 본 건 다름 아닌 손가락만 한 RX-78 고무인형이었습니다.
(이 고무 인형은 나중에 HJ에 기획 기사로 10년 만에 재회했고, 추억마저 검증해 주는 HJ을 정기구독하는 이유가 됩니다)
파란색 계열이었는지 핑크였는지 고무 인형 색깔까지... 는 기억에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초대, 퍼스트 건담 시리즈를 동시대 현지에서 즐긴, 한국 국적의 몇 명일지 모를 '원 오브 뎀'이었던 거죠.
그때 YJ형이 건담 인형을 줬더라도 잘 보관했을지... 는 미지수보다 기지수에 가깝다고 봅니다. ㅋㅎㅎ
YJ형네 집에 모셔진 일본 책은 어설프게 구경하는 선에서 더 나아가진 않았지만, 팬더 추리 걸작 시리즈는 이 형 집에서 많이 빌려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본에서 살면서 원서로 봤을 법한 시기의 책들이긴 합니다.
YH누나 역시 만화를 좋아했고 당시 유행했던 할리퀸류의 로맨스 소설도 즐겨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모 대형서점 만화 코너에서 장태산 선생님이랑 같이 서 계시던 김동화 선생님은 옅은 금색 EOS 필카를 매고 계셨습니다.
사인을 부탁할... 까 했지만, 용기는 못냈고, 평상형 매대에 진열한 모 유럽 작가의 번역물을 꺼내 보면서 나누는 담소를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죠.
YH누나 덕에 읽은 '내 이름은 신디'의 작가가 김동화 선생님이라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내 이름은 신디'
발레를 소재로 한 만화야 차성진 선생님의 '조막새의 꿈'도 있었지만, 만화를 보면서 미장센이란 개념과 작품에 끼치는 밀도 등을 어렴풋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던 작품입니다.
이를테면 사이펀으로 커피를 내리는 방법을 묘사하는 소품이나 주방 인테리어 디테일이 상당히 섬세했죠.
저는 믹스 커피를 탈 때 물 먼저 붓습니다.
프림은 물을 붓고 나중에 타야 커피 맛이 그윽해진다는 '내 이름은 신디'에서의 가르침이 행동을 지배한 버릇입니다.
옆집 누나 덕분에 선입견 없이 재밌게 읽었는데 중요한 이야기 줄거리는... 증발해 버렸고, 남은 건 커피 타는 장면이랑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외국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순정 만화 전용 필터 효과 없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여객기 그림만 남았습니다.
(한 여자분 캐릭터가 흘린 눈물이 커피잔에 떨어지는 묘기 대행진 장면에 깔깔 웃으면서 본 기억도 납니다)
특이한 성씨 중에 '빈' 씨가 있습니다.
2, 3, 6학년 같은 반이었던 친구 중에 빈 씨가 있었지요.
(전화번호부에 빈 씨 모두 친척이라고...ㅋㅋㅋ)
'요정 핑크'의 빈 씨가 익숙했던 이유이고 이 만화 역시 김동화 선생님 작품입니다.
옆집 형이 이사 가고 또 다른 옆집 형, 재승이 형도 이사하자 두 집에는 제 또래 친구들이 이사옵니다.
재승이 형네 집은 저랑 중학교까지 같이 간 SJ, HJ형제, 그리고 YJ형이 살던 집에는 예전에 동네 수퍼를 잠깐 하다 이 친구 아버지께서 부동산으로 성공해서 돌아온 친구는 5학년 때 같은 반 짝꿍이 됩니다.
SJ란 친구는 똑똑하고 프라모델을 좋아했습니다.
프라모델을 간접 체험할 기회가 이 친구 덕분에 많이 생겼습니다.
하늘색 아카데미 제공호나 M1 에이브람스 탱크도 이 친구 덕분에 구경했습니다.
어쩌다 미니미니 시리즈 사서 조립하는 게 당시 제가 누리던 온전한 프라모델 활동이었달까.
다분히 마초 성향의 SJ, HJ형제는 순정만화류와는 거리가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래도 '학생과학'을 같이 보고 SF 관련 얘기를 공감하던 몇 안 되는 친구였죠.
이즈음 1년 남짓 동네에 살다가 미국으로 간 Y.정현 이란 친구도 기억납니다.
아주 어릴 적 동네 친구였는데, 가족 따라 부산으로 이사 갔다가 이민 가기 전, 부산 억양 장착하고 잠시 돌아온 친구였습니다.
뽀얀 피부에 이국적으로 잘생긴 외모는 주근깨도 살짝 보였고, 공부도 잘하고, 저보다 한 뼘 가까이 키 차이도 나는 건장한 체격에 운동, 특히 축구를 잘하는 사기캐입니다.
이 친구 하면 못 지킨 약속 하나가 오랫동안 마음에 걸립니다.
'신문 돌릴 때 나도 데리고 가줘.'
부산에서도 신문 배달을 했다는 이 친구는 이사 와서도 경력직(!)으로 용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약속을 한 어느 봄날 새벽, 저는 못 일어났고, 여러 면에서 형 같기만 했던 그 친구는 지키지 못한 약속에 미안해하면 문제 삼거나 더 이상 언급하는 일 없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습니다.
정현이의 이민을 전제로 한 이사(전학)로 학교가 살짝 술렁거렸습니다.
같은 반은 아녔지만 정현이랑 같은 반이었던 준표라는 친구를 통해 반 분위기를 전해 듣기로는 몇몇 여학생도 서운해했다고...
존잘남의 존재감,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겁니다.
이 친구가 이민가기 전 제게 빌려준 책이 있었는데 일본 '프라모도감 プラモ図鑑' 해적판 두 권, 그리고 역시 '무라카미 토시야 村上 としや'의 '디오라마 대작전 ディオラマ大作戦' 해적판이었는데요.
프라모델 좋아하지만,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제 모습을 보고 대신 사준 배려였다는 걸 한참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돌려주려는 날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예정된 이민 계획과 몇 가지 숨은 사연도 알게 되었고, 그 책들은 선물, 아니 원래 제거였다더군요.
(이 친구는 프라모델이랑 거리가 있었던 게 저보고 장난스럽게 '에이고, 또 장난감 가지고 노냐?'며 같이 놀아주던...-_-)
저보다 어른스럽고 부족함 없어 보이던 친구는 이곳에 적기 어려운 고민에 저를 먼저 찾아와 많은 얘기를 나눴던, 두세 번 곱씹고 지나서야 생각의 깊이와 배려를 이해할 수 있었던 속 깊은 친구입니다.
나가서 놀려면 허락이 필수였던 제 행동반경에 대문보다는 담을 넘어서 저를 찾아와 준 거였고요.
연락이 끊겨 근황이 궁금한 이 친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순정 만화 주인공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80년대 해적판 상품 시장 규모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국민학교라고하면 한 반에 60명 넘는 학급이 학년별로 열에서 열 두 학급이나되던 일개 연대급 규모가 떠오릅니다.
주로 문방구에서 샀던 학습용 출판물과 교재에 아이콘처럼 반복 유통되던 시각 자료는 어디선가 도용한 그림임이 뻔했고, 설산 아래 신칸센이 지나가는 장면을 배경으로 '후지산이 그립구나.' 같은 대사를 수정 없이 직역한 만화책들은 어쩌다 '추적 60분' 같은 TV 프로에서 불법 만화가 복제되는 현장을 보여주며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도가 제가 체감할 수 있는 제재의 전부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일본 만화 원본에 쌓여 열심히 그림 그리는 화면 속 업자를 부러워했던 게 부끄러운 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우주 해적 코브라'는 마치 '카우보이 비밥'처럼, 어린이 시선으로 보면 어딘가 어른의 영역을 살짝 찍먹 해보는, 본방 사수는 거의 불가능했고, 어른 안 계실 때 혼자 몰래(? 사실 몰래는 아니지만,) 봤던 '베스트셀러극장' 주말 대낮 재방송 같은 타이틀이었습니다.
일본에 사는 이모가 사줬다는 휴대용 액정 게임기 본체 왼쪽에 코브라가 부조로 각인 된 신기한 물건을 들고 온 친구 녀석에게 제가 가지고 싶다고 어필하자 제시받은 값은 3,000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제 모습은 강백호가 밧슈 살 때 그 해맑은 표정 생각하시면 비슷합니다)
비슷한 시기, 저랑 이름이 똑같은 만화방 사장님 누나한테 빌린 만화, '루팡 3세'는 갱지에 조악한 인쇄였지만 재미를 감추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만화였고 2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가을, 이사와 함께 버스로 통학하는 환경 변화로 자연스럽게 친구 집에 놀러 갈 수 있는 '틈'이 생깁니다.
만화뿐 아니라 청소년 향 하이틴 소설에 빠삭했던 C.근구란 친구가 살던 집 근처 도서관으로 주말마다 저를 인도했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난 두 권짜리 책이 있습니다.
낙서를 좋아하지만 늘 제 그림의 기준은 또 다른 누군가의 그림이었고, 인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우람에서 나온 박기준 편저, 유명 애니메이터 '코가와 토모노리湖川 友謙' 작가가 쓴 '애니메이션 작화법アニメーション作画法'의 해적판 '만화영화기법'을 본 후였습니다.
그림체에서 더블 제타의 캐릭터가 보여서 같은 분인가 싶었는데, 한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키타즈메 히로유키 北爪 宏幸' 작가분이 '코가와 토모노리湖川 友謙' 작가의 업계 제자였습니다.
그림을 그려도 주로 남자나 로보트, 자동차였고, 만화체 낙서만 즐기던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를 접하며, '이분들 선화는 그냥 (실사/극화체)만화네.'라며 정의만 내리고 뭔가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던 저를 인체 구조와 사물을 선과 면으로 나누는 빛의 존재와 의미마저 새로운 시각으로 눈을 뜨게 해줬죠.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이 2D에서 3D로 옮겨가고, 오른손으로 그리면 소홀해지는 앵글과 고쳐야 하는 버릇 등 직접 언급은 없어도 생각해서 스스로 깨닫게 해준 책입니다.
이 책의 영향으로 '공간 퍼스(퍼스펙티브, 원근법)'나 '데포르메'처럼, '오오시마 야스이치 大島 やすいち'의 '권법소년 一撃伝' 해적판으로 익힌 '센치' 같은 일본식 표현에 익숙해지고, 서브컬처에 적극적으로 빠지는 시기가 사춘기처럼 다가옵니다.
동아 수련장, 다달학습 같은 참고서에 담긴 일러스트 중 어딘가 퀄리티가 좋고 출처가 불분명한 그림들은 '나가타 모에 永田 萠'작가님 그림이었고, '오오타 케이분 おおた 慶文' 같은 일본 작가의 작품이 무한(?) 복제 되는 현실에 배신감보다 뭔가 혜택으로 여겼던 이면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살던 동네나 환경을 생각하면 해적판과 원본을 비교적 일찍 동시에 소비하면서 유추할 수 있던 카피 시장 시스템은 뭔가 나만 알아본다는 쓸데없는 근자감도 장착(어우 창피해. ㅎㅎㅎ)했던거 같고요.
미술 시간에 왜 이런 걸 안 가르쳐주나 원망스럽던 박기준 편저의 '만화영화기법'의 내용은 도서관에서 보자마자 폭주하는 소유욕에 서점으로 달려갔고, 도서관보다 신간 정보가 빠른 서점 매대에서 찾은 또 다른 인생 책, 'Andrew Loomis'의 저작들을 만납니다.
'앤드류 루미스의 책이 없었다면 코가와 선생의 작법서는 존재할 수 없었겠군.'
코가와 선생의 서명마저 루미스 작가의 사인과 비슷해 보인다며 저 혼자 내린 결론입니다. ㅎ
'앤드류 루미스' 작가의 작법서는 '번 호가스 Burne Hogarth'의 '다이내믹 각종 드로잉 시리즈'만큼 해적판으로 많이 유통되었는데, 막연하고 추상적인 대상을 상대로 이들보다 이 책을 늦게 알게 된 만큼 뒤처진 기분이 들 정도로 '조급해 증후군'에 빠진 저였습니다.
암튼 이분 책을 보면서 연습장에는 여성을 그리는 빈도가 자연스럽게 늘어났습니다.
여자를 그린다고 놀리는 진부했던 분위기에 논리로 맞설 수 있는, 오히려 당당해진 이유를 깨닫고 덩달아 자존감도 커지는 기분이었지요.
(이즈음 망가체 그림 스타일에서 벗어나 제 눈에 늦게나마 매력적인 필력과 내공이란 게 보이기 시작한 작가분은 그림 밀도로만 보면 스타일이 아니라! '신카와 요우지 新川 洋司'와 비견하고 싶은 '백성민' 선생님 그림이었습니다)
중학생 때 접한 하비재팬, 모델 그래픽스는 모형잡지 그 이상이었습니다.
모형을 매개로 일본 서브컬쳐를 이미지로만 소비했고, 읽을 줄 몰랐던 덕분에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포털이자 앰프였죠.
('Rockwell Renaissance'라는 문구로 제 시선을 잡은 서점 입구 옆 매대에 미술 잡지로 만나게 된 '노먼 록웰'의 스위트한 일러스트와 스토리를 담은 한 장의 그림이 전하는 일러스트의 힘은 전통 회화나 디오라마를 이해하는 문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HJ, MG 책 구석에 보이는 썸네일 그림 하나에 폭 빠지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갈 뻔하다 관심의 줄 끝, 기억의 고리에 걸려있던 아슬아슬했던 이미지가 확실해지는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타미야 인형 개조 콘테스트 수상작에는 '노먼 록웰'도, '알폰스 뮤샤'도 있었기에 그림과 모형의 조합은 이론적으로 오류 없이 잃어버린 학교 미술 시간의 연장선에 안착합니다)
영상이나 출판 매체로 소비한 적 없이 수첩에도, 필통에도, 수많은 카피 완구와 소년잡지나 참고서에 이미지 일러스트로 무료 봉사한 그림들만 특별히 골라서 좋아하는 유전자라도 있는 건지 남아있는 기록이라고는 기억밖에 없는 것들이 모여있는 잡지는 구매해서 소유하고 싶은 현실적 벽은 둘 째 치고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Know How를 쌓기 위한 지름길이 Know Where라면 그 존재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거죠.
수입 서적이 유통되는 몇 곳을 알게 되고, 논노류의 패션 잡지보다 작은 시장이었지만, 프라모델 잡지 사이에 눈에 띈 책은 '뉴타입'이었습니다.
그림만으로도 배부른 잡지가 책꽂이를 조금씩 잠식하면서 고민합니다.
'내용 정도는 알아도 되는 거 아니야?'
사무치게 궁금한 내용을 알려줄 누군가가 없는 이상 믿을 건 저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부하지?'
무작정 EBS 교재를 한 권 사놓고 봤지만, 이미 진도를 많이 나간 여름(7/8월호)이라 다음 해 3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서점에 즐비한 입문서 중에서 뭐를 골라야 할지 제게 기준도 조력자도 없었고요.
(YJ형이랑 더 친했어야 했나?)
학원사 세계대백과사전 15권 세트가 있음에도 무리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사신 아버지 덕분에 저만의 해법을 찾습니다.
우선 백과사전 '일본' 하위 항목, '일본어'에서 찾은 50음도를 찾아 메모 카드에 옮기고는 책을 볼 때마다 하나씩 익힙니다.
'이게 그동안 글자로만 인식한 일본어렸다?!!'
이렇게 시작한 일본어 독학은 다음 해 3월 EBS 강좌가 시작하기 전 히라가나, 가타카나, 그리고 기본 조사와 알고 있던 약간의 한자로 잡지 내용을 조금씩 해독?하는 작은 성과를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듬해 시작한 EBS 라디오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녔습니다.
책만 사고 방송을 놓치는 한 해를 두 번 반복합니다. ㅋㅎㅎ
(웃기는 건 나름 큰 오류 없이 잡지에서 읽은 내용을 전달해도 어설프게 일본어 좀 한다고 아는 척하지 말라는 말은 다름 아닌 모형 쪽 사람에게 들은 말로, 그 말씀에 더 열심히 공부하기는 했는데 취미 독학 수준이라 뼈 때리는 팩폭이었을 지는...)
열심히 안 했다고 했지 손을 놓았다고는 안 했습니다. ㅎ
당시 동생이랑 마르고 닳도록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란마 1/2입니다.
이때 대영팬더 버전의 성우진은 마치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SBS의 '마법 소녀 리나'와 '에스카플로네'에서 꽃을 피우는 전조현상과도 같았습니다.
'란마 1/2'의 경우, 뜨문뜨문 사 보던 뉴타입에 줄거리가 정리되어 있어서 비디오 출시 전에 어떤 에피소드가 앞으로 나올지 동생에게 발 번역으로 알려줬던 추억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KBS에서 방영한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스토리나 그림뿐 아니라, 감독 '데자키 오사무 出崎 統'의 연출, 오스칼의 '정경애'님, 앙드레의 '백순철'님, 앙투와네트가 죽기 전 시중을 든 시녀 역의 '최덕희' 성우 등, 애니메이션을 입체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계기는 퍼즐 맞추기처럼 뉴타입으로 '란마 1/2'을 예습하는 즐거움과 환상적인 우리나라 성우분들의 연기 덕분이었습니다.
외화를 보면서 유명 성우 몇 분 기억하는 수준에서 일부러 주말 라디오 극장 같은 오디오 컨텐츠를 찾아 듣기도 했죠.
1998년 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앞둔 90년대에 초반, 제법 합법적인 루트로 일본 문화가 많이 유통되기 시작합니다.
'아카가와 지로 赤川 次郎'의 소설, '카이로엔 밤이 없다', '천사는 신이 아니다' 같은 추리소설 번역본 광고를 신문 지면에 크게 실은 게 란마를 즐겨보던 즈음입니다.
(현대자동차의 SUV, 아니,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페가 주요 일간지 광고에 실리고 저는 구매 버튼을... ㅋㅋㅋ)
심지어 '와타세 세이조 わたせ せいぞう' 작가의 'Heart Cocktail'마저 '하우 투 러브'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아카데미 V 건담이 나왔을 땐 모형점에 종종 들리던 모 개발부 직원분이 반다이 제품보다 더 잘 만들었다며 목에 힘주어 자랑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V 건담을 마지막으로 반다이 카피를 멈추고 금형을 깨부수고 할인점을 포함한 재래시장 거래처를 우리나라 건프라 유통망으로 빠르게 스며들며 반다이 코리아 한국 상륙을 위한 초석을 다져 준 곳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입니다.
반다이 제품 수입처로 행보를 넓힌 이력 역시 90년대인 걸 보면, 합법과 불법 사이에 간을 보는 일본 서브 컬쳐가 돈줄이었던 관련 유통업계의 움직임이 흥미롭게 어지럽던 시절이죠.
뉴타입에서 즐겨 읽던 기사는 'How to Art'입니다.
매달 선정한 작가의 작업 프로세스랑 도구를 소개하는 기사는 보는 즐거움 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디지털 페인팅이 일반화된 요즘이지만, 지금 시각으로 봐도 매우 아주 많이 좋은 내용을 담은 단행본은 How to Digital Art Vol.1 포함 모두 4권입니다.
잠깐 좀 더 과거로 돌아가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사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특정 분야 고객 증가로 생긴 틈새시장을 과학사라는 간판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동짜몽'이 '도라에몽'이 되고, '애럴'이 '아라레' 로 커밍아웃하듯이, 반다이, 타(다)미야, 하세가와를 더 이상 소년잡지 속 광고나 해적판 서적, 그리고 아카데미의 탈을 쓴 카피가 아닌 현물로 전국에 퍼집니다.
모형점에서 본 타미야 카탈로그 속 사진은 아카데미의 그것으로 이미 익숙한 사진이 많았고, YJ형네 집에서 오리지널을 접했던 신기한 세상을 다시 경험한다는 두근거림은 '복습'이란 단어에 '신나는'이란 수식어를 처음 붙인 순간이었을 겁니다.
하비재팬, 타미야 출간물, 쉐퍼드 페인의 저작물은 영화 속 마법서가 풍기는 기운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학교 근처 작은 모형점에 진열되어 있던 Building and Painting Scale Figures는 How to Build Dioramas보다 먼저 샀습니다.
(한번은 이 모형점 사장님이 사모님이랑 부부싸움 하는 현장에서 태연하게 구경하다 조용히 계산하고 나온 기억이...)
제가 산 첫 영문 모형 책이었고 How to Build Dioramas는 하비재팬 번역본을 먼저 산 이후 Kalmbach Books에서 나온 원서를 구할 수 있었죠.
완구 수입이 풀린 86년 이후, 저의 행동반경 기준 87년부터 늘어났던 과학사 간판은 아카콘과 국내 첫 모형잡지 출현의 전조현상이었고, 이 두 이벤트를 직감할 수 있던 타미야의 정경(디오라마) 가이드북의 영문 책 제목을 대놓고 응용한 책자, 'Diorama Guide Book & Collections of Works'가 아카데미에서 나옵니다.
다분히 추측 섞인 가설이지만, 취미가를 만든 사람들의 터치가 짙게 녹아있던 아카콘 작품집 2권은 시기상으로도 창간호가 나오기 1년 전 책입니다.
아카콘 2권 - (하비재팬에 실린 디오라마 제작 기사 번역본 + 아카콘 출품작 + 걸리버모형회 찬조작품 + 만화 + 초보자를 위한 기초편 + 실제 무기 정보) ≒ 미군, 독일군 복장 일러스트 = 누가 봐도 그분 그림이죠.
타미야 정경 가이드 북 タミヤ情景ガイドブック Tamiya Guide Book of Diorama Techniques (1986)
'아카데미에서 일하던 분들이 걸면 걸리는 걸리버 출신이랑 드디어 모형 잡지를 만드는구나.'
라고, 바로 유추한 근거는 창간호에 묻어있는 아카콘 작품집의 흔적 때문이었고, 창간호에서 밝힌 MG, 모델 그래픽스와 협력관계로 예상 가능한 모델카스텐의 한국 진출을 내심 반길 수 있었습니다.
카탈로그를 제외한 최소 두 번의 출판 예행연습으로 책을 낼 결심은 대단해 보였고, 전국에 퍼진 모형 전문점이라면 아카데미 거래처와 교집합일 테니 서점 이외의 유통망으로 확보하기에 수월했을 겁니다.
(이상하리만치 이에 대한 언급은 제가 사각지대에 있어서 그런지 본 적이 없습니다.)
일부 필진들의 기사가 좋았습니다.
동생 데리고 자주 다니던 HM 내과에서 즐겨 본 LIFE의 2차 세계대전 책은 익숙했어서 여전히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문제는 '설마 허락은 받고 실은거겠지.'하고 심드렁하게 지나갔습니다.
무단 전재라도 뭐 어쩌겠습니까, 늘 있던 익숙한 일이잖아요. ㅎ
2년이 흐르고 플라스틱 모델 저널이 나옵니다.
'잡지라기에는 팬진, 동인지 같은데?'
창간 축전 메세지에는 '이게 사실인가?' 싶던, 국내외(=일본) 인지도 높은 의외의 회사 목록에 마치 모델 그래픽스 창간호에서 본 그것과 비슷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훈장질하기 좋아하는 어느 분에게 호되게 뚜들겨 맞습니다.
전문 모형지라서 사봤다기보다 지리적 특혜로 자연 발생한 서브컬쳐가 소비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집약된 기록에 의미를 두기도 했고, 못 만들었다고 치부하기 어려운 다양한 시도와 도구들은 볼만했습니다.
(확실한 건 모형 제작 기사만 얘기하자면 저보다 경험도 많고 실력도 좋으신 분들이었습니다.)
스텝 중 출판 쪽 관계자가 있었는지 허영만 선생님 취재 기사도 볼 수 있었고, 미대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는 일러스트 기사는 FSS나 마리오네트 제너레이션 단행본 출간 이전에 뉴타입 영향도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한번 우편 사고를 경험했던 호비스트는 여러 권 주문하면 노끈으로 책을 묶어서 보내줬지만, 도서출판 오존은 로고가 깔끔하게 칼라로 찍힌 하얀색 봉투에 예쁜 여자분, 아니 여자분으로 추정되는 예쁜 손 글씨로 주소를 적어서 보내줬습니다)
만화, '겨울 이야기'를 더 늦지 않고 제 인생 중 적절한 타이밍에 접할 수 있었던 건 오존 출판사 덕분인 건 사실입니다.
(독자의 배송 문의 전화에 믿을 수 없는 우리나라 우편 시스템을 토로하는 호비스트 편집자 후기는 '또 이 전화구나.'라며 말했다는 한 필진이 자기 독백으로 고백했고, 그 글을 읽고 내가 가해자였나 싶어 잠깐, 아주 잠깐이나마 미안했던 게 나중엔 억울했습니다. ㅋㅋㅋ)
오존 출판사의 FSS 무단 도용 같은 사건은 저도 나중에 접했고, PMJ은 다섯 권을 끝으로 폐간, 거의 빛의 속도로 경쟁지?로 이적한 필진은 '플라스틱 모델 저널'이라 불리는 책 팝니다 시전도 합니다.
모형의 완성도야 나보다 잘 만들면 잘 만드는 거고, 나보다 실력이 부족해야 비로소 낮다고 말할 수 있는, 크게 의미도 없고 상대적인 거라, 당시 일본 잡지 역시 늘 상향 평준화된 기사만 실린 건 아녔기 때문에 실력만으로 평가를 내릴 문제는 아닙니다.
값비싼 모형용 수입 폴리 퍼티 대신 조광 페인트에서 나온 뽀리빠데를 이용한 원형 제작이나 3M 레드퍼티, 우리나라 만화 캐릭터 자작을 위해 원형을 컵 몰드로 복제하는 과정은 완성도를 떠나 경쟁지에서 시도하지 않은, 옛날 아카콘 작품집 1호에 실렸던 걸리버 모형회 참조 작품, '미래 경찰'에서 보여준 우레탄과 실리콘 복제 제작기에 부족했던 복제법을 보완하기 좋은 한글 기사였습니다.
지면을 통해 경쟁지의 출현을 대놓고 씹었지만, 견제는 하고 싶었던지 필진을 통해 국산 페인트 회사에서 나온 뽀리빠데를 이용한 제작 기사가 우연처럼 등장합니다.
오토바이 수리하면서 익숙한 냄새에 끌린? 재료라 쓰셨다죠... ㅋㅎㅎ
단골 모형점 실력자 몇분이 잡지 필진이었어서 들은 업계 얘기가 없진 않습니다만.
누가 그러는데... 는 싫고, 암튼 모형점에 있는 에어브러시로 기본 색칠을 한 허접한 단품을 신발 박스(아디다스 가젤! ㅋㅋㅋ)에 넣어 GMM이라는 대회에 참가합니다.
(GMM 직후 화방에서 AS는 절망이었던 사악한 냉콤이랑 리치펜 112C, 113C를 장만했습니다)
상을 바랬을리는 전혀 없고 잡지에 실렸던 작품 실물이 보고싶었던거죠.
모 백화점에 접수를하면 백화점 측에서는 결과 발표 전까지 일반인 전시를 하고, 참가자 투표와 잡지 필진을 포함한 심사원 점수를 집계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일반인 투표도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저랑 똑같은 모델을 열 배는 더 잘 만든 출품작에 한 표를 던지고, 잡지가 담지 못한 실력자는 전국에 많다는 깨우침을 마음에 담고 결과 발표를 기다립니다.
발표날 전시회장, 접수 땐 안 보이던 귀하신 분들?을 알현하고 잡지로 익숙한 그분이 단상에 올라와서 내뱉은 첫 마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 표 받은 건 본인 찍은 거죠?'
접수와 발표 사이 어느 날, 즐겨 다니던 모형점에서 심사진 중 한 명이었던 필진 형이 그랬습니다.
'XXX 니가 만든 거지? 나 너한테 한 표 줬다.'
잠깐 이 형을 원망... 하려다 침착하게 냉정해졌을 땐 그냥 빨리 집에 가고싶은 생각뿐이었죠. ㅋ
그 사람은 얼마나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첫마디로 고른 맨트가 그거였을까...
참가자에게 기념품으로 나눠준 본인이 그린 비행기 일러스트가 담긴 8,000원짜리 철 지난 달력 재고는 집에 도착하기 전 근처 분리수거장에 예쁘게 놔드렸고, 그렇다고 잡지 구독을 끊지는 않았습니다.
필진으로 있는 인연 네 분 중 두 분이랑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연결고리이기도 했고, 할인 많이 해주시는 모형점 사장님이랑 눈빛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챙겨주시던 고정 매출이기도 했어서 갑자기 끊기도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래서 직장생활 중 가급적 사장님 눈빛은 피해야 합니다. ㅋㅋㅋ)
이후 여전히 회자하는 P-47 사건은 업계 밥그릇 싸움을 내돈 주고 소비해야되나 싶은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드래곤 박스아트를 그대로 비네트로 만든 단품으로 참가한 아카콘은 두 모형 잡지 모두 행사를 예고했고, 정작 보이지 않는 완력으로 한 잡지만 독점으로 취재 기사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문장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본질과 동떨어지는 그럴듯한 말과 행동에는 본심이 드러나더라... 라는 판단으로 모았던 잡지를 새로 매장을 오픈한 친척분 휴게실에 기증!하면서 프라모델 대중화에 처음으로 봉사합니다. ㅋㅎㅎ
(어느 스타급 운동선수가 오직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까? 유리한 연봉협상이나 연예인급 연인을 만나기 위해 오늘도 생업에 충실한 결과가 팬들이 보기에 멋지고 속이 후련한 플레이로 승리의 기쁨을 주는 서비스까지가 본업인지라 선수 사생활 따윈 관심 없는 팬들에게 무리해서 편파 중계와 주관적인 평론까지 하려다 보니 본심을 드러내는 상황이 온 거죠)
잡지 후반으로 가면서 내용이 부실해졌다는 것과는 별개로 초반부터 외국 서적 이미지 도용은 빈번했지요.
(HJ에서 번역 출판한 Model Maker's Handbook의 히스토렉스 인형 이미지나, 사무용 메모 핀으로 순접을 쓰는 썸네일은 HJ의 MMM 에서 가져왔고, Military Modeler를 포함한 여러 영문 책자에 실린 작품들, 95년 유로 밀리테리 수상자, Stefan Müller-Herdemertens의 작품은 다음 호 예고 페이지 배경에 흑백으로 교묘하게 이미지를 도용했을 뿐 아니라 오려서 디오라마에 쓰라고 인쇄한 포스터류는 벨린덴 제품이었던 걸 보면, 창간호에 광고 스폰한 킴스 프라모델의 카피품을 일본 모형 관계자 앞에서 창피했다며 자극적으로 이슈몰이하기 좋은 기사를 굳이 여직원(기자) 이름으로 까는 모습에 강약약강의 전형을 보는 거 같았습니다. 저라면 동종 업계 관계자로서 조용히 전화로 얘기해 줬을 거 같지만, 이후 킴스 프라모델 대표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안정적인 자본력으로 오랜 기간 일본 IP를 카피해 온 업체 광고는 번역이라도 하는 성의?를 보였으니 광고주가 영세업자라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 광고비, '동업자적 입장'에서 수정 없이 '꾸준히' 받아준 건지 싶고요)
국내 전문 모형잡지 덕분에 저변이 넓어지고, 소위 서점가에서 '팔리는 책(서점 관리자가 직접 했던 표현입니다!)'으로 나름의 화제성은 있었는지 대형 서점의 수입 코너에 HJ이나 관련 서적이 덩달아 매대에 올라옵니다.
군소 수입 서점이나 모형점보다 몇 푼 더 싸게 살 수 있으면서도 없는 책은 일서 양서 모두 한 자리에서 주문하기 편해졌다는 장점은 더 이상 수입 서적 재고 파악하러 이곳저곳 다닐 필요가 없어집니다.
호비스트 창간호에도 실려있던 그놈의 게임 때문에 모형 인구가 줄어든다는 30년 넘은 만능 패시브 핑계는 인터넷 대중화 이전 출판물 정보량 다양화와 캐릭터 프라모델 시장 확대라는 시장 변화에 순응하려는 노력보다 하고 싶은 말 먼저 지르고 이론 만들기 만성 질환으로 보입니다.
반다이가 MG를 런칭하고 에반겔리온이 나온 95년, 스케일 모형도 걸프전과 드래곤(+중화권 메이커 등장) 버프로 시장이 커지고, 심지어 스케일 모형 전문지 AM이 나온 것 역시 97년으로, 모형 시장은 공급도 늘어나 99년엔 HJ 편집자가 타 출판사로 가서 전격하비를 내놓습니다.
우리나라는 IMF 타격으로 잠시 주춤하는가 했지만, 제가 다니던 모형점처럼 소수 마니아가 매출을 주도하면서 오히려 규모가 커진 경우도 있었고(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반다이랑 콜렉터향 아이템들 덕분에 대기업 다니는 친구 부럽지 않다며 매출이 좋았다는 얘기는 사석에서 들었습니다), 이때 환율크리를 잘 버틴 곳들은 2000년대 온라인 시장으로 빠르게 진입해서 여전히 잘 나가는 곳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되죠.
고객의 높아지는 눈높이를 맞추며 업계 수준을 주도하는, 거의 일본 제품이긴 했습니다만, 외국 제품이나 정보 서비스와 접점은 가까워지고 아카데미 유통망으로 꿀을 빨던 반다이는 드디어 국내입성에 성공합니다.
네오가 창간하고 얼마 지나서 수입 서점 겸 모형점 사장님을 통해서 들은 얘기는,
'아카데미가 프라모델 제조 접고 유통만 한대요.'
'네?!!'
'에헤이, 그럴 리가...요, 그래도 회사 뿌린데.'
우리나라 계산대 이모님들의 돈 세는 속도에 성공을 예감했다는(근거 없이 들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또 이 말이 재미는 있어서 ㅎ) '까르푸' 이후, 백화점 성공 속도를 빠르게 추월하던 할인점의 확장으로 샵인샵 개념으로 할인매장에 입점하기 시작한 아카데미 매장의 판로는 넓어지고 소문 때문에 생긴 마음의 착시였는지 프라모델 개발도 주춤해 보입니다.
뭐랄까, 8, 90년대 중 저가 국산 프라모델 시장을 소비했던 세대가 현재 프라모델 매출을 몰고가는 건 아닌지 싶은 게 신규 유입 모델러는 신생아 감소 비율과는 상관없이 저 당시 30년 전 3, 40대 모델러 인구랑 비슷하다고 하면 전체 규모는 크게 변화가 없어보입니다.
(매출을 몰고 가는 주력 소비자가 직장생활과 육아로 잠깐 주춤한 시기가 프라모델 소비 저조를 이끌다가 최근 코로나와 아크릴 물감 대중화로 빵 터진 최근 성장세를 설명하는 게 아녔을까... 방구석 분석을...)
기록의 민족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우리나라 모형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자료는 찾아보기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현태준 작가님처럼 다양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고 송락현 씨처럼 방대한 자료를 가진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프라모델 잡지사 역시 이 분야, 우리나라 프라모델 역사에 대한 자료나 이야기를 체계있게 풀어나갈 역량은 부족해 보였고, 시장 트랜드와도 거리가 멀어지더니 갈수록 개인 작품집 성향이 짙어지는 행보가 국내 모형 잡지 줄 폐간의 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반다이 제품이나 토미의 조이드를 유통하느라 국내 IP에 소홀했는지, 뽀로로 버프는 놓쳤어도 폴총리는 확실히 잡습니다.
펀샵에서 팔던 드론 메이커로 기억하는 홍콩회사, Silverlit 외주로 만든 로보카 폴리 완구 열풍으로 아카데미과학 관련 뉴스가 늘어나고 기사 속 이미지는 전보다 젊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직장생활에 프라모델이랑 거리를 두고 결혼과 육아로 할인점이나 완구 전문 매장에서 보이는 아카데미의 변화가 소비자가 주도하는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 회사의 방침 전환으로 보였던 이유는 예전에 모형점 사장님한테 들었던 '아카데미가 프라모델 제조 접고 유통만 한대요.' 가 떠올랐습니다.
매출이 인격인 회사입장에서 창업의 뿌리였던 제조업의 상대적 부진을 어떻게 바라봤을 지 관계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고 상관할 바도 아니지만, 당시 대표이사의 인터뷰나 기사에 달린 댓글로 수입 유통에 재미를 보고 있는 분위기 파악은 가능했습니다.
커뮤니티에서는 친, 반, 중도로 나뉘어 제품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아카데미 프라모델 사업의 존폐위기까지 걱정하는 글도 심심치 않게 보였으나, 실상은 모델러보다는 회사 내부에 더 큰 변화와 움직임의 원인이 있었던 거죠.
반전은 아마도 유통을 주도했던, 그러니까 프라모델 개발진을 핫바리로 봤다던 임원이 아카데미가 2세 경영으로 승계하자 얼마 안 지나고 퇴사해서 만든 회사가 데이비드 토이라는 사실이고, 대충 10년 지난 지금 사업적으로 성공 했다고 볼 수 있으니 최소한 IP 개발과 외주 생산을 통한 유통 위주의 방향성이 옳았음은 증명해 보였습니다.
만화로 시작해서 즐겨 보던 잡지에 이어 프라모델로 마무리하는, 두서없는 포스팅에서 하고 싶은 말은 아카데미 참 열심히 일했구나 입니다.
일찍이 건프라 전설의 초석을 다진 1981년에는 반다이와 기술 협력관계였던 회사임에도 반다이 코리아, 정확하게는 반다이 코리아 한국인 직원의 갑질에 힘들어하는, 모형점에서 자주 봤던 마트 관리 직원의 하소연에 실소가 나오기도 했고요.
(마트에 매대 무너졌다고 GR, 매출 안 나오고 반다이 말고 다른 회사 아이템 신경 쓴다고 GR 한다며 투덜거리던 친구는 나중에 반다이 코리아로 이직하는 매직을 ㅋㅋㅋ)
간혹 관계자라는 사람이 전하는 내용을 또 다른 관계자의 발언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경우도 있어서 확증 없이 퍼다 나르기 곤란한 이슈도 있고 어느 말이 맞는지는 저도 몰라서 저를 중심으로! 아는 한도 안에서만 썰을 풀었습니다.
금형부에 계시던 분이 에어 소프트건 회사를 차리고, 개발부 직원은 옵션 파츠 업계를 이끌고, 유통을 진두지휘하던 직원은 독립해서 완구회사를 만들고, 마트 영업을 뚫으신 분은 모형 문화 대중화를 위해 다양한 툴을 개발하고, 경쟁사였던 회사 대표가 만드는 제품으로 서로 상생하는 모습에 모형인 키워서 남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미래의 완구 꿈나무 양성을 위해 학교 진학을 포기한 학생에게 기숙사와 기술을 제공한다는 채용 공고도 있었습니다)
아카콘 작품집 두 권으로 국내 첫 모형 전문 잡지 출현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조력자였음에도 언급되는 감사의 글은 본 적 없지만, (그렇다고 아쉬울 거 없이 크고 건강한 회사이긴 합니다) 추억의 한편에 존재만으로도 작은 기쁨이기도 했고,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저를 중심으로(나름 중요!ㅋ) 최대한 사실에 근거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저로서는 언제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전성기와 비교하면 오랜 경험의 '프라모델 전문 금형 회사' 로 보이기 시작한 10여 년 전 이후, 제품 개발 외주가 늘어나면서 멀어진 정보 주도권과 고이고 진부한 홍보 채널에 큰 소리 안 내고 방관하며 남 좋은 일만 하는 모습이 초기 반다이 코리아와의 관계를 보는 거 같아서 별 영향력은 없는 한 모델러 눈에는 아쉽습니다.
(물론 프라모델 한정입니다. 수입 유통이랑 에어 소프트 건 시장은 별개인 얘기입니다!)
2세 경영 이후 늘어난 자체 개발 상품 구색도 많아지고 했으니 누군가 어디선가 아카데미 고유 개발 역사 정도는 정산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소극적으로 기대를 합니다.
('인형 제품만 더 보완하면!' 이란 숙제는 한계가 아닌 목표로 삼으면 되는 거고요)
예전 아카콘의 한계처럼 느껴졌던, 타미야나 반다이 흔적 없이 진행하기 어려워 보이는 출품작도 아카데미 상품으로만 제한을 둔 아카콘은 신나는 일입니다.
(Aㅏ, 인형!)
심사위원 구성이나 운영 방법 등 미리 걱정이 앞서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외국에 이런저런 대회 기준 어쩌고 보다 많든 적든 모델러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아카데미라서 가능한 정기 패밀리 세일 있잖소!!! 행사가 문화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고 싶은거죠.
“Great artists never attack other artists”
마이클 잭슨 삼촌이 남기신 말씀이라는데,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아도 이런 말씀 하셨을 거 같긴 합니다. ㅎ
BLUE의 시리어스한 표정과 인물들의 대사는 뭐랄까, 화장실에 가서도,
'나의 까칠한 미각의 편린들이 찾은 욕망은
잊지 못할 향미로 나를 만족시키고는
고통 없이 내 몸의 아픈 독소를 녹인다,
마치 아름다운 대낮 설경을 보여주고
조용히 밤새 거리를 청소하는
아침 출근길의 녹은 눈 같아,
안녕,
나와 필연적 이별이 운명이었던 하루 세 번의 욕망이여...'
...
..
.
노래 가사같은 대사의 향연은 90년대만의 향기가 있어서 여전히 재밌습니다.
'너무 웃지는 마. 그래도 나름 아빠가 즐겨 보던 작가님 책이란다.'
라고 직접 말할 용기... 는 못 냈고 같이 깔깔 웃어주고는 조용히 독백으로만...
그래도 아이들 하루에 한 번씩 웃기기 미션은 성공했으니, 유쾌한 웃음 소리에 기분도 좋고 그냥 다 좋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점프 트리 A+를 보여주는 거였는데 말이죠... 기분 좋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순정 만화를 좋아하냐고 물으신다면,
네, 저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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