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기 전 어느 날, 시각 장애를 극복하고 타국에서 사는 한 가장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를 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늘 그랬듯 무심코 튼 TV와 이를 방해하는 사람 없이 집에 혼자였다는 두 가지 조건이 만든 우연이었죠.
조명이 꺼진 어두운 방에서 (아마도 점자로 된) 동화책을 읽어주셨다는 아버지만의 놀라운 능력에 감사하는 아들의 인터뷰와, 장성한 두 아들의 어릴 적 목소리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하나 씩 꺼내 재생하면서 녹음 당시의 구체적인 장소며 상황을 설명하다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해맑게 웃던 아버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얼리 어답터분들이야 PDA 단말기를 일찍부터 썼겠지만, 퇴근하고도 급한 일에 대응하라며 회사에서 일부 지원해준 아이폰을 처음 쓰면서 위에 언급한 옛날 방송이 떠올랐나 봅니다.
'오오, 요 녀석이라면 나도 어둠 속에서 책을 읽어줄 수 있겠군!'
자면서 옹알거리는 목소리를 담을 녹음 기능과 기존 폰카나 똑딱이와는 차원이 다르게 빠르고 똑똑한 카메라마저 삼켜버린 편리함은 언제 웃을지 몰라 순발력이 필요한 인생 샷을 찍는데 최적화된 성능을 경험하면서 퇴근 후 연장된 업무에 대한 불만 정도는 가볍게 상쇄할 수 있는 보너스였습니다.
(초기 아이폰은 지금 봐도 사기캐랄 수 있는 완성도입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허겁지겁 내리고 출구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마저 다섯 걸음 정도 뛰어올랐을 때 두 손을 꼭 잡고 나란히 유쾌!한 길막을 하고 서 계시던 한 노부부의 뒷모습에 미래의 여유 있는 노년 생활을 그려보고, 각각 10대 후반과 초반으로 보이는 두 자녀의 손을 꼭 잡고 쇼핑하는 중년 여성분의 뒷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가족 계획을 따라 할 정도로 철없고 가벼운 편입니다.
덕분?에 와이프랑 손잡고 다니는 게 자연스럽고 가족 계획도 제가 선언!한(꿈꾼) 대로 되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죠.
성별마저 기가 막히게 맞춰버린 제 꿈이 태몽이 맞다며 덕담도 곁들어주신 주위 어르신들의 응원에 우쭐했는지, 만약 5인 전대물 가족이 되었다면 미리 이름까지 지어놨던 막내는 딸이었을 거라며 굳게 믿었던 걸 보면 철없고 가벼운 건 여전합니다.
지난해에 이어 어린이날 포스팅을 뭘 쓸까 고민하다 아빠로서 관통하는 일관성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이들 인생에서 가장 먼 시절의 기억들을 가능한 많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억(기록)하는 것!'
확인할 길 없이 기억에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제 어린이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치고는 부모니까 가능한 특권이기도 하고, 딱히 애들에게 부담 주는 일은 아니라서 고마운 마음으로 기록하고, 챙기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하나씩 소중히 꺼내보며 아이들과의 키 프레임을 소환하기 위한 '추억 배당 종신보험'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직장생활로 시작된 데이터 백업의 생활화는 평균 시속時速 25메가바이트 이상으로 차 버리는 아이들 사진&동영상을 외장하드에 옮기는 백업 인생을 위한 훌륭한 예행연습이었고, 가끔 따로 적던 육아 일기는 업무 다이어리로 넘어온 게 이젠 기본 포맷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크면 나랑 무슨 얘기를 나눌지 궁금해하고, 한글은 언제 떼나 싶던 통과의례적인 걱정을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제 플래너에 남기고픈 사건?을 적어달라며 아주아주 가끔 부탁도 하고, 가끔은 보다 자주 오늘은 뭘 적었나 봐도 되냐며 굳이 허락받고 보곤 합니다.
하루하루 의미 있는 순간Keyframes을 또렷하게Vivid 기억Memory하기 위한 가족 공공재가 되어 이젠 비밀이랄 것도 없네요.
'아빠, 이거 같이 만들고 색도 칠하기로 했잖아, 언제 할 거야?'
최근 계획에 없이 큰아이와 방을 바꾸면서 잠들어 있던 모형 생활을 깨우는 막내의 한 마디 덕분에 할 일이 생겼습니다.
서페이서 올리면 아크릴 과슈가 잘 먹을 거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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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처음 맞이하는 어린이날 100주년, 어린이 두 분 모시고 시작!
제 얘긴 아니고... ㅋ
위 MV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는 영화 Buffalo 66의 배우(여주인공), 크리스티나 리치(Christina Ricci)의 몫입니다.
법적으로 어린이(!)였을 때 들었던, 어린이랑 안 어울리는(?) 노래는 이미지를 클릭/터치하면 유튜브로 이동합니다.
(지난해 어린이날엔 화성을 다녀왔으니 올해는 달로 떠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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