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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완2024

[Day 16] 할아버지는 취미 부자셨다는데, '대화는 필요해' - 21 Shades of My Faves

by VM 2024. 11. 23.

▲ 제가 태어나기 훠얼씬 전부터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수석(壽石/愛石) 잡지를 즐겨 보셨나 봅니다

두괄식이라 일본어를 잘하셨다는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잘하셨다는'이라고 무책임한 투로 쓴 이유는, 쓰시는 걸 볼 일도 없었고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집에 몇 권 뒹굴던 일본 책은 다 할아버지께서 보셨던 책들이었죠.

 

 

 

▲ 프라모델로 치면 작은 비넷 정도의 밀도입니다

일본어를 독학하게 될 줄 미리 알았으면 할아버지께... 아, 원래 가족끼리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거 없기죠? 크하하

일본에서 살다 온 아랫집 형보다 더 거리감이 느껴졌던 할아버지의 일본어였습니다.

거듭, 제가 접한 일본어에는 할아버지와 접점은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작게나마 있었단 얘길 할 겁니다)

 

 

 

▲ 이 정도는 귀엽고 작은 단품 인형 같죠?

무슨 수업 시간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는 4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옛 학창 시절 일화를 말씀하시는 도중 당신의 은사님 이야기를 하시면서 성함을 크게 칠판에 적습니다.

"S.CS"

"어, 우리 할아버진데..."

반 아이들 대부분 선생님 말씀에 경청하지 않던 분위기임에도 순간 정적과 함께 열댓 명 정도의 시선이 저에게 집중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 디오라마 급 밀도의 구성입니다

동명이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정도로 논리적이지 못했고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이야기라 학교 선생님이셨다는 이력은 할아버지를 대중 앞에서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께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딱히 기억에 남는 제자는 아니셨는지 담임 선생님을 모르시더라는... ㅋㅋㅋ

따로 홀로 사시던 할아버지는 제가 기억하는 중학교 1학년 가을 학기까지 거의 10년 이상 아침, 저녁에 식사만 하시러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할아버지 명의의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쓰니까 뭔가 복잡하지만, 증조할머니 모시고 할아버지 명의의 집에 삼촌이랑 저희 식구가 얹혀살고 있었단 거죠. 그래서 집에 할아버지 물건이었던 책이나 수석 몇 점, 고장 난 턴테이블 등이 집안 여기저기에 있었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은 독립했습니다)

 

 

 

▲ 받침대를 받치는 멋진 원목 베이스의 장식이 과도합니다 ㅎㅎㅎ

조금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초딩 2학년이 되고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피아노 레슨을 받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은 혼자 였는데 아마도 방학을 맞이해서 충동적으로 어른끼리 얘기하다 나온 소일거리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왜 배우게 되었는지는 모를 레슨은 그렇다 쳐도 뭘 믿고 버스에 혼자 태워 보냈는지 지금 생각하면 좀 아찔하기도 합니다.

 

 

 

▲ 관음석이라 앞에 향로?를 놨을까요???

할아버지 댁은 한 내과 의원이랑 이어진 주택 건물 2층에 있었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맞으셨는지 같은 시간에 저보다 돈이 되는(!) 바이올린 제자에 더 신경을 쓰시는 모습을 알아볼 눈치는 있었습니다.

딱히 가르쳐 주신 거 없이 책 한 권 펴놓고 혼자 놀다 보면 잠깐 오셔서 핀잔 비슷한 잔소리 잠깐 하시다 다시 누나들 가르치러 가시면 학교 음악시간에 실로폰으로 치던 계이름을 독수리 타법으로 복습하면서 놀았습니다.

(조금 비약하자면 제가 치는 이 '소음'을 바이올린 레슨에 방해 요소로 여기셨나 싶은 심증은 있습니다)

 

 

 

▲ 어릴 때 '중국' 하면 뭔가 판타지 같은 이미지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와장창 깨졌쥬 ㅎ

이렇게 하루 20분이 채 넘지 않는 피아노 구경은 2주 만에 마침표를 찍고 인생에 빠른 포기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때 그게 최선이었나?"

주어가 내가 될 수도 있고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의문은 음악에 재능이 제로임을 느낄 때마다 되돌아가는 기(준)점이 됩니다.

(여름 방학 끝자락이긴 했습니다)

 

 

 

▲ 오, 이런 도구를 보면 '수석'이란 게 모형이랑 비슷한 면이 많아 보이는 취미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어느 겨울, 오토바이랑 접촉하는 가벼운 교통사고로 할아버지께서 몸져누우시는 일이 생기고 그 몇 년 만에 할아버지 댁을 부모님이랑 같이 문병 하러 갑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는 가해자분이 미끄러지지 마시라고 손수 고무밴드로 칭칭 감아 놓았고 집으로 들어가 낯선 방 안 침대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뵙고 어색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초딩 2학년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바뀐 거실 여기저기를 구경합니다.

창가 벽쪽의 낮은 책꽂이에 길게 시리즈로 놓인 일본 클래식 음악 잡지는 오랜 기간 구독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중 한 권만 핑크색 표지 배경 위로 '카라얀 Karajan' 할아버지가 한껏 무게 잡은 모습이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 연구원 가운을 입으실 필요가...

한참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증조할아버지께서 열심히 모아 놓은 재산의 혜택을 제일 많이 받으셔서 나름 큰 어려움 없는 청, 장년을 살아오신 예술가 이미지입니다.

가끔 제자가 사 왔다는 학용품 중 애들용 사쿠라 색연필이랑 톰보 4B 연필을 쓰라고 주신 기억도 잊을 수 없고요.

취미로 유화를 그리시던 할아버지 댁 거실에는 작업 중인 캔버스가 이젤 위에 놓여있었고, 홀베인도 아닌 홀바인 유화물감을 즐겨 쓰신 기억은 다 할아버지 말씀에 기인합니다.

(후기 인상파 영향을 받은 풍경화나 조각도와 인두를 이용한 박 공예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고 저는 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거북이 박제가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본 기억이 납니다)

 

 

 

▲ 초음파 타공기까지! 이 정도면 최첨단 도구가 아녔을지 싶습니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던 할아버지도 연로하시고 혼자 사시기에 무리가 오자 삼촌들은 아버지 모시기 릴레이에 동참하던 몇 년 사이 명절 때 찾아뵈었을 땐 예전의 할아버지 집이랑 비교하면 단출한 짐들만 남았습니다.

"그 많던 책들이랑 작업물들은 다 어디 갔지?"

가끔 따로 부르셔서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고 계란 노른자 들어간 건강 음료?도 타 주시고, 딱 한 번 타주신 커피는 그 진한 향과 맛을 잊을 수 없는 인생 경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중엔 이런저런 불만이 늘어나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됐을 얘기까지 하실 정도로 노년이 매우 심심해 보였습니다)

 

 

 

▲ 만화가 빠지면 섭섭하죠

삼촌들의 할아버지 모시기 릴레이가 10년 정도 되었을 즈음 갑자기 위독하시다는 말씀에 찾아뵈었을 땐 이미 응급실에 계셨고 삽관까지 해서 대화가 어려웠습니다.

연습장에 하실 말씀을 적어서 의사소통하시는 와중에도 묻어나는 여유 비슷한 위트에서 캐릭터가 보였달까.

못다 한 이야기들이 샘 솟는 타이밍이 아쉬웠던 건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만 했지 궁금한 걸 못 여쭤본 지난 시절의 학습된 침묵 때문입니다.

 

 

 

분재도 모형으로 나오는데 스마트 스피커 기능의 돌 모양 애수지(愛樹脂 아이쥬시)는 어떨지 싶네요

 

하비재팬 엑스트라 Vol.6 : 좋은 킷이란 무엇일까?

어제의 포스팅을 하기 위해 책장에서 꺼내온 하비재팬 엑스트라 6월호.2017년이면 제가 이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입니다.코로나 전이니 당시의 분위기로는 프라모델이라는 장르의 취미의 인기가

likealive.tistory.com

 

 

그때 할아버지께 먼저 살갑게 다가가서 궁금한 거 이것저것 여쭤도 보고 피아노도 열심히 쳤더라면 많은 이야기를 공감하고 악기 하나쯤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손자의 궁금증에 딱히 귀찮아하진 않으셨을 거거든요.

친구 N. YH 도움이 아녔어도 일본 서점 정보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더 먼저 알 수 있었을 텐데,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할아버지, 이거 뭐라고 읽어요?

 

▲ 딱 봐도 견적 나오죠? 누가 봐도 '에어 울프'죠?

초딩 때 교내 글라이더 대회 챔피언?급 실력을 자랑하던 L.상길이 형이 빌려준, 상길이 형의 형 소유의 일본 책에 에어 울프랑 똑같은 헬리콥터가 보여서 궁금했습니다.

"벨 222"

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단호한 음성으로 들은 짧고 굵은 단답형 정답이 불어넣은 하찮은 자신감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에어 울프 이야기를 할 때만 되면 목에 힘을 주고 아는 척하는 이유가 됩니다.

 

 

"야, 에어 울프 그거 원래 벨(Bell) 222야!"

꼴랑 가타카나 두 자로 할아버지의 일본어 능력 검증?이 되었던 허탈한(?) 기억은 살면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와의 일본어 교차점이자 반전도 없는 종착점입니다.

저녁 식사 중 TV에서 흘러나오는 교육 방송의 일본어 강좌에 아주아주 기본적인 아침, 저녁 인사만 또박또박 알려주신 적은 있습니다.

 

 

"그때 그 상길이 형이 빌려줬던 책은 구할 수 있을까?"

기억에 남아있는 헬리콥터 이미지만으로 그 책을 유추하고 쇼핑까지 클리어하는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면 오늘 포스팅은 글로만 적든지 아니면 포기했겠죠?

기억을 구체화하는 재미를 즐기는 편이라 결국 기억 속 이미지 한 페이지를 단서로 요 책을 구할 정도로 나름 집요하거나 혹은 피곤한 성격은 QED 했습니다.

 

 

 


 

 

 

더 궁금한 건 할아버지의 일본어 실력보다 6·25 때 돌아가셨다고만 들은 할머니 이야기였습니다

♬ New Trolls - III Tempo: Cadenza - Andante con moto (1971)

뭔가 여쭤보면 안 될 거 같은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분위기였으나 어린 나이를 무기 삼아 여쭤봤더라면 좋았을겁니다.

그 옛날 바이올린 연주 가능하신 분의 설레는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아쥬 그냥 궁금해 미취겠고요.

집안 내력을 믿지 않는 이유가 저의 음악성? 부재에 대한 원망이라면, 유전인가 싶은 건 또 하는 짓이 닮은 게 없지는 않아서뤼, 가족력 DB가 좀 더 많으면 재밌겠다 싶을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더 자두' 사모님의 '대화가 필요해'를 올리려다,_

♬ a-ha - The Sun Always Shines on T.V. (1985)

생애 첫 칼라 TV 구경은 학교에 입학하고 교실의 교단 옆 무자비하게 제 키보다 큰 체스트 박스 안에 들어있던 거였지만, 집에서 본 거는 가끔 천 보자기에 싸서 손수 할아버지께서 들고 오신 아담한 칼라 테레비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첫날에 본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의 '녹색 클로렐라 피부'를 잊을 수 없네요.

밥상머리 대화에 낄 짬은 아녀서 듣고만 있어야 했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어른들만의 리그 중, 당시 TV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진짜 기억이 안 나서 모르는 모 대중가수 창법이 엔카 비슷해서 말이 많다는 아버지 말씀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아빠랑 아들 사이에 연예인 잡담이었습니다. ㅋㅋㅋ

 

할아버지도 아빠도 설마 그 당시 일본 노래 몰래 들으셨던 거?

역시 세대 간 대화는 필요합니다.

 

 

 

전에 말씀 드렸던 인생 앨범 중 하나, 'Cibo Matto - STEREO☆TYPE A'입니다

♬ Cibo Matto - Spoon (1999)

학교에 들어가기 훠얼씬 전, 서너 살 때 할아버지 모습 하면 검은 레자 헌팅캡, 안경다리 없이 옅은 갈색 테에 이어진 손잡이로 안경에 걸쳐서 쓰시던 돋보기, 그리고 A4보다는 작았던 기억의 세로로 긴, 역시 검은색 메신저 백이 있습니다.

폭신하고 부들부들한 질감이 좋아 만지작거리며 놀기 좋아했던 그 가방에서 가끔 요구르트를 꺼내 주시곤 했는데 이 기억이 좀 더 특별했다면 식빵 테두리를 요 요구르트에 찍어 먹는 법을 알려주신 거죠.

그 요굴트에 절인 식빵의 달달함과 증조할머니의 설탕에 비빈 콩가루 밥이 그리는 F퐌상의 th쌍곡선 콜라보에 저의 오른쪽 턱 어금니는 서서히 녹아내렸다는 슬픈 '실화!'가 있습니다. ㅋㅋㅋ

 

 

이게 생각나서 두 아이에게 시식한 결과란, 큰 아이는 '아빠의 옛이야기는 갬성적으로 이해는 해도 딱히 맛은 별로!'였고 꼬맹이는 '강렬한 손사래와 함께 적극 거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