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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완2024

[Day 18] 턴테이블 잃은 LP판, 자격과 선언 사이 - 21 Shades of My Faves

by VM 2024. 11. 26.

▲ 가지고 있는 LP판은 이렇게 딱 두 장입니다

새벽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상가건물 1층에 눈에 띄는 간판이 보입니다.

"와, 그림 되게 멋있다."

한참을 쳐다봤던 그 간판은 레코드 가게였고, 지금 생각하면 낮에 들러서 물어봤을 만도 한데 저답지 않게 왜 안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 앨범 뒷면도 이렇게 예쁘고요

저 왼쪽에 라면발 머리카락 그림이 바로 그 레코드점 간판 배경이었습니다.

너무 멋있죠?

당연히 그때는 이 앨범의 뒷면 커버가 원본인지도 몰랐고요.

 

 

 

▲ 게이트 폴드 커버 안에는 이렇게 또 그림이, 배경에 기하학적인 도안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Spirograph가 생각났습니다

집이 이사를 하고 그 레코드 가게와 동선이 멀어진 어느 날 시내 레코드점 쇼윈도에 놓여있는 앨범 커버의 익숙함에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번화가에서 한참 떨어진 교차로의 코너에 있던 이 가게는 평수는 작았지만, 매장 안쪽에 드럼이 놓여있었고 가운데 놓인 석유 곤로 주위로 쇠 파이프 프레임에 동그란 레자 방석이 달린 스툴이 옹기종기 놓여있었습니다.

겨울이었고 미성년이라 맥주는 권하지 않았습니다.

 

 

 

▲ 로트핑 펜으로 일일이 점을 찍어서 그렸을까요? 직소 퍼즐 연출이 재밌습니다

아트록의 전도사 성시완 아저씨의 음반 사업이 한창일 무렵, 매장에 모인 대학생 형들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소비자에게 말을 먼저 건넨 건 아마도 드럼 주인이 분명해 보이는 매장 주인 형이었고 난로 위에 자글거리며 익고 있던 따끈한 맥주 안주 새우깡도 쥐여주고 그랬습니다.

(요거 요거 입에 넣으면 수분을 빨아들이는 '쫘르릅'하는 골전도 소리와 바삭거림의 식감 블렌딩이 색달랐습니다)

CD로도 가지고 있지만, 이 앨범은 LP만 가능한 그 스케일과 갬성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턴테이블도 없는데 말이죠우.

 

 

 

▲ Tudor Lodge 앨범이랑 같이 산 '멜로우 캔들'의 'Swaddling Songs' 앨범은 게이트 폴드는 아닙니다

판타지 영화 마술사 모임 같은분위기의 'Mellow Candle'이 들려주는 음악은 사진 속 이미지랑 너무 잘 어울립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이모, 외삼촌들처럼 생겼습니다. 크하하

이젠 전축(電蓄, 전기 축음기)이란 단어가 생소한 시대가 되었지만, 이런 장르의 음악을 소재로 앨범 커버 아트나 당시 뮤지션을 모에화한 캐릭터, 혹은 진지한 음악을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애니메이션이 보고 싶습니다.

 

 

 


 

 

 

살면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내가 알고 있는 건 상대방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걸 마치 상식처럼 당연하게 여길 때 많이 일어납니다.

이보다 심각한 경우는 나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자격의 우선순위를 남에게 요구하는 상황이고요.

마치 정주영 선생이라도 된 거처럼 과잉 발언하는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말 대부분 '나는 듣고 싶은 말만 듣겠다!'는 강한 의지 표현과 동의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형 몇 개나 만들어봤냐며 개수 놀이하는 분들은 포트폴리오 보고 자격 심사가 일상으로 보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제품을 직접 개발하고 영상 처리 프리셋 짜는 개발자가 아닌 이상 디지털  카메라 회사 제조사별 특징에 대해 논할 자격도 없고 요리할 줄 모르면 맛에 대해 평가도 안 해야 맞겠죠.

모형 정도 밀도의 취미는 외부에서 자격을 주는 게 아닌 내가 하고 싶을 때 만드는 선언제에 누구나 발언권을 가집니다.

 

 

전축 없어도 LP판 모을 수 있고 모형 만들어 본 적 없는 사람도 신박한 지적으로 제품 개선에 도움 되는 조언할 수 있는 겁니다.

 

 

 


 

 

 

시골 초저녁에 이 곡이 크게 울려 퍼지던 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 Tudor Lodge - Madeline (1971)

그렇다고 한 번도 턴테이블 위에 올라가지 않은 건 아닙니다.

바늘에 긁힌 적 있지요.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밝은 시골, 본가에서 시야 안에 들어오는 거리의 2층 건물에 혼자 살던 친구의 호출이 있기 전, 이런저런 얘기 중 놀고 있는 턴테이블이 있으니 LP판 있으면 올 때 챙겨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곡을 즐겨 들었습니다

♬ Mellow Candle - Boulders On My Grave (1972)

친구 표현대로 전투적인 주방에서 일을 했던 이력은 요리도 뚝딱, 냄비도 돌솥도 아닌 처음 보는 질그릇 모양의 밥공기에 직접 밥을 짓던 그 친구의 레시피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스 팬 대신 프라이팬에 너무너무 맛있는 밀크티를 후식으로 끓여주며, "그냥 먹어."라며 웃으며 말했던 기억도 생생하고요.

"니가 가져온 거, 그거 틀어보자!"

그날 이후 괜히 다른 턴테이블에 올리는 게 미안했던 건 그냥 그때 친구 집에 놓고 와야 했다는 길고 긴 후회를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포스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