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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취미 일상] 플라모델, 새로 둥지를 틀다 (1/2) - 모형 & 도료 편

by VM 2021. 1. 28.

지난해 11월 말, 이삿짐을 싸다 이 녀석들을 보고는 (좋은 의미로) 한참을 멍 때리고 있었다.

이미 이만큼 쌓여 있는데 고민할 필요 있나?

▲ 이런저런 핑계로 슬금슬금 사모은 것들(왼쪽)과 주인의 간헐적 현타를 피해 10년 이상 살아남은 녀석들(오른쪽)은 정작 여행준비중(?)

간간이 방구석에서 모형을 하던 신혼 때의 여유와는 차원이 다른 육아 덕분에 10년 넘게 모아 온 각종 모형과 관련 잡지를 처분하도록 설득하는 녀석은 다름 아닌 이사(移徙)였다.
자주 손이 가던 키트 빼고는 박스 안에 봉인되어 방 한편 족히 0.7 CBM은 차지하고 있던 짐들을 두고 뭐라 하는 식구는 (다행히!) 아무도 없지만, 이사를 하거나 방 정리를 할 때마다 취미가 아닌 정리(일)로 마주하는 당사자(나)만 있을 뿐이다.
창간호부터 구독하던 모형 잡지들을 처분할 땐 의외로 덤덤했고, 많은 건 아니지만 드려도 실례가 되지 않을 상태 좋은 모형들도 필요하신 분들께 미련 없이, 기분 좋게 양도했어서 어떻게 넘겼나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10년 넘게 모은 하비 재팬 이랑 모델 그래픽스는 박스 싸느라 고생 좀 했다.
 

다시 시작해 볼까?

▲ 박스와 설명서만 남은줄 알았는데 짐정리중 방패와 라이플 발견! MG등장 이전 각도기 선생의 일러스트가 담긴 설명서가 일품이다.

모형 입문에 크게 기여한 건 역시 건프라와 일본 잡지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잡식성으로 바뀌었다.
제대로 모형을 하기 위한 번거로움의 시작과 끝을 대충 아는 터라 고민보다는 실행을 위한 계획을 세운 지 한 달.
제일 먼저 손을 댄 건 나님의 미련 덕에 살아남은 녀석들의 재고조사!
 

▲ 뚜껑을 열자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늘 베란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도료 박스를 열어보니 살짝 역한 시너 냄새가 난다.
 

▲ 먹자니 뜨겁고, 포기하자니 맛있어 보이는 뜨거운 감자의 도료버전.

밀폐용기(락앤락) 수용능력 범위 안에 10년 이상 묵어 계시던 것들.
군제 제품은 시너를 넣어주니 의외로 안료가 부드럽게 잘 녹는다.
 

▲ 군제 (현 GSI CREOS) 제품들, 최근 제품들은 깔끔한 플라스틱 뚜껑으로 바뀌었다.

래커 시너는 신기하게도 거의 그대로 남아있고, 유리병의 밀폐력도 좋아 뚜껑만 잘 닫아 놓으면 냄새도 안 난다.
서페이서와 녹인 퍼티는 뚜껑 외부만 살짝 녹이 슬었을 뿐, 시너 더 넣어주고 잘 저으니까 여전히 쓸만하다.
(에어 브러시를 사용해도 될 만큼 떡짐 없이 안료가 고운지는 확인해야겠다.)
 

▲ 메탈 프라이머가 어딘가 있어야 하는데 빠졌다.

마크 소프터는 열화로 제 기능을 할까 싶으나, 일견 쌩쌩해 보인다.
 

▲ 판매가 1,800원으로 박제 된 Mr. Hobby Semi-Gloss Black

뭔 짓을 해도 건조가 안되고 끈적거리던 타미야 에나멜 때문에 구매한 래커.
(고생한 기억은 특히 잘 남음!)
기억에는 문지르면 특유의 금속광택을 내주는 특색 포함 더 많이 있었는데, 군제 래커는 요놈만 남았다.
요녀석, 뚜껑 열기 참 힘들었는데, 요즘 제품도 그런지 모르겠다.
 

▲ 라벨은 습기를 먹어서 제거했다.

내가 산 건 아니었지만 생애 첫 모형 물감이었던 팩트라 은색 에나멜 이후로 꽤나 오래 사용한 타미야 에나멜들.
차선책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타미야 에나멜은 모형 색칠의 알파요 오메가였달까.
비싼 전용 시너 대신 잘 사용하던 라이터 기름에 잘 녹지 않아, '에나멜 성분이 바뀐 거 같아요. 아니 바뀐 게 라이터 기름인가?' 루머가 돌던 시절에 산 것들로 역시나 굳어버린 녀석들은 버리고 없다.
 

▲ 두둥!!!!!!!! 100년 역사의 그 물감!!!!!!!!

옛 외화의 한 아역배우가 이렇게 생긴 깡통 물감 뚜껑을 열고, 시너 희석 없이 원액으로 비행기를 붓으로 색칠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과 같은 물감인지는 모르나, 한동안 피겨의 메인 색상은 험브롤을 쓰고 유화로 색상을 조절했다.
위의 라벨 디자인은 나름 당시 신상품이랍시고 모형점에 많이 깔렸던 디자인이다.
 

▲ 삼일운동하던 1919년, 자전거용 오일을 공급하던 Humber Oil Company에서 검은색 페인트에서 시작, 취미용 물감으로 사업 확장!

험브롤을 쓰게 된 계기는 #61 Flesh에 빨강 유화물감을 섞어 쓰는 타카이시 마코토(高石 誠)씨의 인형 색칠 기법을 아머 모델링에서 접하고 나서였다.
자주 가던 매장에 #61 재고가 없어서 최대한 비슷한 색으로 고른 것이 위의 #81 Pale Yellow.
 
고석성高石 誠 선생께선 지난해 타미야 1/35 인형 얼굴 하나로 SNS와 아머 모델링 지면에서 인형 색칠의 신기원을 보여줬고, 나로하여금 '모형, 다시 시작해 볼까?'를 실행에 옮기는 데 한 영향 끼치셨다.
이분, 최근에는 발레호 아크릴 물감으로 갈아탔다는데, 특이하게도 래커 시너로 아크릴 물감을 희석해서 생기는 침전물을 거르고, 이 '발레호+래커시너' 조합을 에어브러시로 기본색을 칠한다고 한다.
발레호 물감과 아크릴 과슈의 특성을 적절히 잘 사용한 타카이시 선생의 결과물은 뭐... 이분 이름만 구글 해 봐도 상단 메인에 화제의 인형 얼굴이 뜬다.
(이분, 전공이 유채화/油彩画!)
 

▲ 역한 냄새의 주역, 테스터스제 시너. 맨 뒤 오른쪽 병처럼 투명했던것이 노랗게 변했다. (아주 노랗다. ㅡ_ㅡ)a...)

플라스틱 커버에 숨어있는 안쪽 금속 뚜껑에서 녹(rust)이 용출했는지 색이 누렇게 변했다.

냄새가 심해서 정신 위생상 버리고 유리병만 재활용해야겠다.
다행?히 미스터 하비GSI Creos에서 나오는 밸브형 시너 병뚜껑이랑 호환된다.
 

▲ 어느새 인형 강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세계적인 피겨 조형사 중 한 분이신 서정호님 원형.

손은 썩었고, 알고 있던 지식의 유통기한은 지난 지 한참 되어 다시 시작하려니, 그래도 나름 신난다!
제품에 동봉된 튜브 본드와 커터칼이랑 니퍼(아니면 손톱깎이)만 있어도 박스 뚜껑을 바닥에 깔고 하루 종일 즐거웠던 모형 생활 아니던가!
 

▲ 1999. 9월... 쩝 저땐 반다이 제품이 아카데미 유통망을 이용하던 20세기였다. 15년? 전 즈음에 온라인으로 산 물건.

"왜 다시 시작하는데?"
마트에 가서 아이들 장난감을 살라치면 나름 완구에 일가견이 있다 생각하는 자부심!에 결정권의 8할을 가지고 있던 터라 10년 이상 쉬는 동안 기회를 엿보고 있었나 보다.
모형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니 대충 이 정도가 아닐까 한다.

  • 타미야 인형 : 3D 스캔을 이용한 놀라운 디테일을 인젝션으로 업그레이드
  • 반다이 RG : 금형기술의 한계를 모르는 인젝션 키트의 정점으로 구현하는 미친 기획력
  • 포스트 드래곤 : 중국 신생회사의 약진 (더 이상 싼마이 만은 아니라서 많이 아쉽다)
  • 수성 물감의 전성시대 : 건강한 모형 생활을 이끄는 견인차
  • 아카데미과학 : 오랜 기술력과 2세 경영 이후 두드러지는 오리지널 제품 개발

 
 


 
 
레진급 디테일을 대체할 수 있는 인젝션 1/35 인형!과, MG급 디테일을 구현한 1/144 건프라의 출현은 이미 한참 전 얘기이고, 정보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전하던 전문지 덕분이었는지 예전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수성물감의 경우 지금은 아크릴 물감 전성시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약간의 인내심이 충분조건인 해외직구는 잡지 속 아이템들을 더 이상 먼 나라 얘기로 놔두지 않는다.
(늦어서 그렇지 오기는 오더라.)
니퍼를 들고 모형을 즐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nippper 같은 사이트를 보고 있자니 슬슬 기록 본능이 살아난다.

(무려 p가 세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