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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고백] 사실 샤프보다 홀더/클러치 펜슬을 더 좋아합니다 - feat. 로트링 아트펜

by VM 2021. 12. 25.

▲ 샤프와 홀더 펜슬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후자를 고를 겁니다.

5학년 겨울 방학 숙제로 '나의 발명품'이란 노트를 쓴 적이 있습니다.

지금 보면 낙서 수준의 23가지 아이디어 중에는 몽당연필이 되면 항상 5cm 정도 못쓰고 버리는 심이 아깝다고 남긴 스케치에 '절약 연필'이라고 이름을 지었네요.

(모나미 볼펜통을 연필깍지 삼아 아껴 쓰더라도 버리는 게 3.5cm면 대략 전체의 20%는 됩니다.)

대량 생산의 효율성 따윈 고려치 않은 짧은 생각이었지만 그날 저녁, 불이 꺼진 방 천정을 바라보면서 전 세계에서 버려지는 연필심이 산처럼 쌓이는 상상(걱정)을 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 글씨가 아주 그냥 날아다닙니다. 기특하게도 날짜(1월 24일)는 잊지 않고 적었군요.

구체적인 날짜나 연도는 기억에 없는 어느 날, 생긴 건 샤픈데 굵은 심을 쓰는, 그 당시엔 이름 모를 세련된 필기구를 쓰고 있는 한 여학생을 본 순간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어! 너, 쓰고 있는 이 펜, 이거 뭐야?'

네, 아쉽게도 이 세맆흐는(만) 독백이었습니다.

 

 

 

▲ 심 홀더는 샤프보다 구조적으로 내구성이 더 좋습니다. 위 제품은 에어브러시로 익숙한 바로 그 '리치펜 Richpen' 제품입니다.

샤프와 달리 홀더 펜슬은 전용심 한 개만 넣고 쓰는데 그렇다고 불편한 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매우 단순한 구조라 샤프처럼 심이 막히거나 언젠가 갱년 변화해서 제 기능을 못할지도 모를, 심을 잡아주는 고무(보유척 / Lead Retainer) 부품도 없죠.

색깔 있는 사람이 되라고 영웅본색! 색심도 나오는데 칼라 샤프심보다 튼튼해서 좋습니다.

 

 

 

▲ 숙주가 될 아트 펜의 펜촉 길이만큼 나온 홀더펜슬의 심 선단부 사이즈가 절묘하게 잘 맞습니다.

4년 전이었나? 펜촉이 녹슨 줄로만 알고 있던 로트링 아트 펜(EF) 만년필을 재활용한답시고 개조했습니다.

(사실은 15년 가까이 관리하지 않아서 잉크가 굳었을 뿐 닦으니까 깨끗해지더군요. 그렇다고 다시 만년필로 쓰기에는 이미 배럴을 잘라버린 시점이라... 대신 느끼할 정도로 뽀얀 광택에 로트링 펜촉은 내구성이 좋구나 싶었습니다.)

최근에는 캘리그래피용으로 저렴하고도 쓸만한 만년필이 많이 나오던데 옛날엔 입학/졸업이나 취업 선물로 인기였죠.

한동안 성인을 위한 컬러링북이 서점가에서 유행하더니 요즘엔 유튜브나 SNS의 똑똑한 AI는 집콕 극복하라고 다양한 필기구를 이용한 짧은 손글씨 영상을 추천해줍니다.

(AI : 그건 니가 많이 봐서 그런 거야!)

 

 

 

▲ 4년 전에 개조한 거라 과정 사진이 없습니다. ㅠ_ㅠ... 아트 펜의 펜촉이랑 자르고 남은 바디는 가지고 있었네요. (왜?)

개조 과정은 단순합니다.

  • 로트링 아트 펜에 맞는 홀더 펜 물색 : 홀더의 심이 나오는 선단부가 아트 펜의 펜촉 길이만큼만 나와야 뚜껑을 닫을 수 있고, 아트 펜 고유의 디자인 비율을 유지할 수 있어서 홀더 펜슬 고르는 게 의외로 어려웠습니다.
  • 아트 펜 윗 부분 절단 : 펜촉을 포함한 유닛(Nip/Feed/Nip Casing)을 제거하고 홀더의 바디 길이로 상단을 자릅니다. 
  • 푸시 버튼(노크)이 들어가게끔 절단한 아트 펜 바디 상단 안쪽을 둥근 줄로 갈아줌 : 배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아트 펜 특유의 디자인에 맞는 크기의 푸시 버튼 찾기도 힘듦니다.
  • 이식할 홀더 부품을 아트 펜 바디에 고정 : 나사 구경이 맞지 않아 화장지를 에나멜 선으로 감아주고 순접으로 고정했습니다.

20세기에 독일에서 건너온 두 유물이 21세기가 되어 실수로 만나 퓨전!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막힌 혈관의 콜레스테롤을 청소하듯 펜에 남아있는 잉크를 씻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충분히 보상받았습니다.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개조 작업의 경우 아웃풋이 좋으면 제품이 방어하는 AT필드를 뚫고 게임에서 이긴 기분이죠.

(나, 난 그럼 사도?!! 아... 아니 에... 에반가?!!)

 

 

 

▲ 이렇게 펜 길이 15cm짜리,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심홀더가 생겼습니다.

심을 뺀 바디 무게는 18.82g, 캡 무게는 4.54g, 합쳐서 23.36g입니다.

주로 뚜껑은 빼고 쓰는 걸 감안하면 지금까지 리뷰한 두 샤프의 중간이라 적절한 무게랄 수 있습니다.

(닥터 그립 풀 블랙 : 20.3g  /  오랜즈 네로 : 16.75g)

일부 홀더 펜슬 제품의 푸시 버튼 안에는 심을 갈 수 있는 날이 들어있는데 이 제품이 그렇습니다.

 

 

 

▲ 무게 중심은 왼쪽 기준 7.3mm이라 아슬아슬하게 저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게 뭔 의미가 있겠습니까. ㅎ

정작 일반 샤프심 한 통 보다 무거울 2mm 심을 넣고 쓰면 무게 중심이 좀 더 아래로 이동할 거라 큰 의미는 없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로트링 아트펜 시리즈 중에 아트 펜슬 Rotring Art Pencil이란 이름의 심 홀더가 있었습니다.

한땐 몸살 나게 가지고 싶던 물건이었지만 이미 과거형이고, 스프링이 펜 상단에 노출된 구조라 더 이상 끌리지 않습니다.

(물욕 패치 완료! 중고시장에 매물이 나와도 제 기준으로는 저세상 가격이라...)

 

 

 

▲ 펜 뚜껑은 이렇게 꽂아서 쓸 수 있긴 한데, 젖은 신발 신고 걷는 기분이랄까. 대신 뚜껑에 달린 클립 덕분에 굴러가는 건 방지됩니다요.

펜의 무게 중심을 크게 신경 쓰진 않지만 중심이 위에 있으면 오래 쓰기 피곤합니다.

Rot는 독일어로 붉다는 뜻이라는데 그래서 아트 펜의 그립과 바디 사이에 '빨간R⦿t 링Ring'을 넣었나 봅니다.

(쿠와트로 곽달호의 원형을 다룬 영화, The Red Baron (2008)은 독일어로 Der Rot Baron 입니다.)

제도용 잉크만큼 충분히 검은 플라스틱은 적당히 딱딱한 질감에 미끄럼 방지 주름이 잡힌 그립은 필기감이 좋고, 포인트가 되는 빨강색 링이랑 하얀 사출 부품&폰트가 그리는, B&W w/Red가 그리는 기막힌 비율 덕분에 눈도 즐겁습니다.

 

 

 

▲ 그래서 집에서 쓸 때는 이렇게 레고로 만든 뚜껑 거치대에 놓고 씁니다.

21세기 들어서 제가 쓸 연필을 산 적은 거의 없습니다.

(딱 한 번 있습니다!)

가끔 애들이 자고 있을 때 필통 속 연필 상태를 보고 사부작사부작 깎으면서 감각을 복습합니다.

포스팅 덕분에 뜨신 방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서 발명노트를 채우던 5학년 겨울방학을 떠올려봤습니다.

 

 

 


 

 

▲ 색심과 바디랑 깔맞춤은 기본! 다행히 검은색 홀더가 두 자루 있어서 고민 없이 개조했습니다.

'오빠,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왠지 뚜껑을 쉽게 잃어버릴까 봐 요즘엔 보기 힘든 필름 카메라용 필름통 뚜껑에 고정한 휴대전화 끈을 필통 바닥에 접착제로 붙여서 뚜껑이 끈 사이에서만 움직이게 손봤습니다.

필통은 와이프랑 연애 초기에 받은 선물로 여전히 홀더 펜슬 전용으로 잘 쓰고 있습니다.

(필통 바닥에 받은 날짜를 철필로 인그레이빙 했습죠!)

 

 


 

결론은 오늘 포스팅, 뚜껑 특집! ?(응ㅁ응)?

▲ 물건 파는 판매원, 연필 깎는 도루코, 홀더 펜은 심연기. 심연기는 유격 없이 심이 잘 깎이는지 꼭 확인하고 사는 걸 추천합니다.

 

 

 

누가 모델러 아니랄까 봐, 재활용한 미스터 하비 서페이서의 공병 뚜껑 색깔(블랙)마저 직관적인 매직!

▲ 이제 심연기(Pointer) 안의 흑연 가루는 검은 '뚜껑' 공병에 따로 모아서 즐거운 모델링에 쓰는 겁니다!!!

 

 


 

 

크리스마스 시즌 상품 하면 바로 요것!

▲ 최근 곰표 콜라보처럼 유행중인 '레트로 und 펀슈머' 붐에 편승해서 이 제품을 다시 구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형기술로 치자면 불호기(정식 명칭인지는 모르겠지만 'Blow Molding'을 '불호기'라고 말하던 업자분이 떠올라서 기록으로 남겨봤습니다)로 만든 빠알간 산타 장화 안에 과자가 들어있는 크리스마스 시즌 상품이었는데, 블로우 몰드 특유의 작은 공기 주입구(Blow Pin)를 보면서 신기해하면서 신어보기도 했죠.

장화보다 제 발이 커졌을 즈음까지 살 수 있던 아주 예쁜 물건이었는데 이젠 남은 기록 찾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위험한 펀슈머(Fun+Consumer) 보다 더 안전하고 매출도 누구 맘대로? 보증할 '(롯데) 산타 장화 선물세트'가 생각나는 성탄절입니다.

 

위 사진처럼 망으로 된 주머니에 들어있어서 망사스타킹(Fishnet Stocking)을 선행 학습한 효과가...

(요무 작가님 화집이 어딨더라?)